(스타트업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Golden State Warriors)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농구팀(주니어 레벨, 4군)에서 포인트 가드로 뛴 적이 있다. 친구들과 놀면서 할 때와 달리 처음으로 (그 것도 미국에서!) 체계적인 팀 농구를 하다보니, 다양한 작전과 전략을 항상 생각하면서 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품에 대한 상상을 하며 창업을 준비할 땐 재밌지만, 막상 사업을 시작하면 골머리 썩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하루는 경기가 끝난 후, 체육관의 트레이너가 내 발목의 붕대를 풀어주며 잠깐 대화를 나눴다.
트레이너: “미덥, 너는 공을 잡으면 제일 먼저 뭘 하니?”
나: “음.. 골대에 더 가까운 동료를 찾아 패스를 해야죠. 만일 마땅치 않으면, 상대 수비가 맨투맨인지 지역방어인지에 따라 스크린을 이용해서 돌파하거나 볼을 돌려서 수비대형을 뒤섞거나 해야죠. 그러다 보면 빈 공간이 나올거고 그 쪽으로 드리블 해서 파고 들어야죠.”
트레이너: “맞아. 근데 그 이전에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건, 슛을 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거야. 그리고 슛을 할 수 있으면 슛을 해.”
맞다. 농구는 슛을 해서 공을 림 안으로 넣어야 점수를 얻는 경기이다. 게임 안에 있다 보면 게임에 함몰돼 경기의 본질과 목적을 잊게 된다. 골대에 가까운 동료에게 패스를 하는 것도 슛을 하기 위함이고, 빈 공간을 만드는 것도 결국은 슛을 하기 위함이다. 이 중요한 깨달음을 얻고… 나는 결국 더 머리가 복잡해져, 농구를 그만 두게 되었다.
요즘 NBA를 보면서, 구체적으로는 농구라는 게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Golden State Warriors를 보면서 매우 오래된 이 대화가 새삼 떠올랐다.
농구의 룰은 간단하다. 공을 던져 림 안으로 제일 많이 넣은 팀이 이긴다. 하지만 멀리서 공을 던져서는 딱 공만한 크기의 림 안으로 넣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슛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 골대 가까이 가서 던지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매우 당연스럽게도 골대에 다가갈 수록 경쟁이 심해지고 더 큰 놈들이 버티고 수비를 한다.
이제까지 NBA의 역사를 봐도, 대부분 빅맨들이 팀의 성적에 가장 직접적인 기여를 해왔다.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 카림 압둘 자바, 하킴 올라주원, 샤킬 오닐, 팀 던컨, 등.. 역대 리그의 강팀들은 모두 슈퍼스타 빅맨들을 보유해왔다. 마이클 조던이나 코비 브라이언트같은 화려한 플레이어들도 결국은 빅맨의 서포트 위에서 날아다닐 수 있었다.
(슬램덩크에서 강백호는 농구 초짜이지만 천부적인 신체능력으로 골밑을 제압하면서 팀의 중심이 된다)
그 동안의 빅맨 중심의 농구 패러다임을 보면 마치 대기업들이 장악을 하고 있는 제조 산업을 보는 것 같다. 덩치도 덩치지만, 일단 대기업은 기본적으로 리스크보단 안전,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이 것 저 것 다 분석하고 비교하고 결국은 upside가 큰 쪽 보다는 downside가 작은 쪽을 선택한다. 뭐 하나 만들려면 부지도 사고, 생산 라인도 깔고, 수백 수천 명의 생산과 영업 인력, 수십 수백만의 물량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가드에서 포워드로, 포워드가 다시 센터에게 공을 순차적으로 전달하듯, 대기업은 공을 잡게 되면 치밀한 전략부터 짜고 연구/개발 – 생산 – 마케팅을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물건을 만들기 전부터 얼마나 팔릴지 대충이라도 알아야만 공격을 진행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결국은 엄청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안전한 선택은 저들에게도 안전한 선택이고, 골대에 가까워져서 슛은 좀 더 용이하지만, 상대팀과의 차별은 없다. 가끔 발 빠른 가드나 화려한 스몰포워드가 코트를 휘젓고 다니듯 기발한 마케팅으로 차별을 두지만, 결국엔 가격으로 승부하고 제로썸 경쟁을 한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차이로 승부가 갈리고 시장이 정리된다.
그런데 NBA 탄생 이래 크게 바뀌지 않았던 농구의 패러다임이 지금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2014-2015 시즌 챔피언 팀 Golden State Warriors(이하 워리어스)가 있고, 또 그 핵심엔 Stephen Curry(이하 커리)가 있다.
(농구의 게임을 바꾸고 있는 Stephen Curry)
그를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아주 간략히 그의 짧은 업적을 정리하자면.. 슛은 곧잘 했지만 작은 신체 조건과 다소 떨어지는 운동 능력 때문에 실력에 비해 과소평가를 받으며 2009년에 NBA에 데뷔한 그는, 꾸준히 성장하며 2013년에 레이 앨런(살아있는 전설 슈터)의 단일 시즌 최다 3점슛 기록을 깨면서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로 매년 리그 역사의 모든 3점슛 관련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도배하고 있다. 그 것도 다시는 깨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인간계를 넘어서는 성적으로 말이다. 특히 현재 시즌(15-16)에는 50% 이상의 3점슛 시도율에 거의 50%에 육박하는 성공률을 장착해 진정한 사기 캐릭터로 거듭났다. 이런 선수는 단언컨대 NBA 역사 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운 3점슛들을 잠시 감상하자)
그의 미친 3점슛 능력이 특별한 이유는, 그는 굳이 경쟁이 심한 골밑으로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말도 안되는 거리에서, 그 누구도 감히 슛을 시도하지 않는 거리와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슛을 넣어대는데, 상대편은 정말 정말 손 쓸 방법이 없다. 그의 미친 장거리 3점슛 비거리 때문에 상대편은 매순간 하프코트에서부터 프레스 디펜스를 해야할 판이다. 그는 이전에 존재했던 슈퍼스타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전율을 일으킨다.
(슬램덩크의 정우성도 개똥슛을 통해 빅맨들의 블락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커리를 중심으로 한 전례 없는 3점 중심의 공격 (혹은 스몰라인업) 농구를 하는 워리어스 팀의 성적 또한 리그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이번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24연승을 하며 미국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긴 개막 연승 기록을 기록했고, 아직도 홈에선 40연승(16.01 기준)으로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지금의 페이스라면 조던의 시카고 불스가 세웠던 불멸의 시즌 72승 기록을 깨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더 재밌는 점은, 나머지 29개 팀들이 이 사기적인 팀을 어떻게든 이겨보기 위해서 워리워스를 상대할 땐 (어쩔 수 없이) 본연의 플레이 방식을 버리고 스몰라인업 공격으로 맞불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실패한다. 그들에겐 커리같은 슛터가 없을 뿐더러, 워리어스가 오랫동안 쌓아온 저력을 금세 베낀다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 많은 대기업도 한번 궤도에 오른 스타트업은 이기지 못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빅맨 농구가 대기업의 방식이었다면, 커리의 농구는 스타트업의 방식이다. 스타트업은 대개 기성 기업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것에 집요하게 파고든다(성공률이 낮은 3점슛을 던지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라고 치부하던 때도 있었다). 골밑으로 들어가봐야 덩치에 밀려 상대가 안되지만, 또 굳이 경쟁을 할 필요도 없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격을 한다. 골밑슛보다 성공률은 떨어지지만, 슛 시도는 더 많이 할 수 있다. 그렇게 슛 시도를 많이 하다보면 성공률은 높아지고, 성공을 밥먹듯이 하는 연쇄창업자들이 탄생한다. 미국엔 리처드 브랜슨이나 페이팔 마피아, 국내엔 5Rocks의 노정석 창업자, 버즈빌의 이관우 대표, 빙글의 문지원/호창성 대표 등이 대표적인 3점슛터이다.
혁신은 이렇게 일어난다. 생각지도 못한,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방식으로 새로움을 만들고 경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Peter Thiel이 “Zero to One”에서 말하는 ‘창조적 독점‘처럼 말이다.
커리의 예측 불허의 플레이들을 보면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흥분이 된다. 사실, 나는 언더독 성향이 강해서 강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워리어스와 커리는 다르다. 아마 그 이유는 그들은 남들이 잘 하는 것을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1 to n’이 아닌 ‘0 to 1’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스타트업처럼 말이다. 그들의 독점이 오래 갔으면.. 그리고 그들의 게임이 새로운 기준이 되는 걸 목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